2014년 10월 라브리 소식편지
사랑하는 기도가족께 올립니다.
어느덧 가을걷이가 한창인 10월이 왔습니다. 저희 부부는 지난 2주 동안 서울, 경기 지역에서 강의여행을 마치고 오늘 집에 돌아왔습니다. 라브리 근방 마을에는 이미 벼를 베어낸 논이 꽤 보입니다. ‘도시’ 속의 ‘빌딩 나라’에서는 ‘강사’로 이러 저리 돌아다니느라 계절이 바뀌는 것도 잘 느끼지 못하다가, ‘산골 현실’로 돌아와 ‘시골 아낙네인 나’를 되찾은 느낌이었다고 할까요?
교회와 선교단체를 합하여 모두 여섯 곳에 가서, 매번 다른 청중을 만나며 주로 기독교 세계관 강의를 하였습니다. 매우 피곤하기는 하였으나 도전도 많이 받고 배운 것도 많았습니다. 강의와 설교를 들은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기도하며, 이제 저희는 본래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사랑하는 기도 가족에게 최근에 있었던 친정 어머니 장례식에 대한 소식을 알려드린 것으로 이 가을의 문을 열려고 합니다. 이미 작년 가을에 갑상선 미분화암 진단을 받은 후부터 어머니의 건강을 위해 부탁드렸습니다만, 결국 어머니는 암을 이기지 못하고 지난 9월 17일 소천하셨습니다.
어머니에게는 그 1년이 무척이나 힘드셨겠지만 지금은 고통의 기간이 길지 않았던 것에 감사드리며, 끝까지 어머니가 믿음을 지키도록 기도해주신 기도 가족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저의 두 동생과 함께 어머니를 간호하며 마지막 일 년을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에 무척 감사드립니다. 제 남동생은 매일 어머니를 옆에서 간호했고, 미국에 사는 여동생은 휴직을 하고 귀국하여 두 달간 어머니를 수발했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일본에서 태어나 해방이 되자 어머니(저의 외할머니)와 함께 한국으로 건너왔습니다. 그리고는 한국전쟁을 겪었습니다. 두 모녀는 일제의 압박과 동족상잔이라는 모진 세월을 보냈습니다. 전쟁 중에 어머니는 북한에서 내려온 청년과 결혼을 했고, 저는 그 가정에 첫아이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여동생 경숙이를 낳았고(남편은 권오익), 남동생 성민이(부인 서혜진)를 낳으신 후에, 온 가족이 하나님을 믿기로 결정을 하셨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저희 부부가 라브리를 세우려고 했을 때, 저의 어머니는 편안하게 사시던 서울 남산 밑 후암동 집을 라브리가 사용하도록 선뜻 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본인은 그 집의 한 귀퉁이에 있는 작은 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불편하셨을 터인데 한 번도 내색을 한 적도 없이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 집을 사용하시는 것에 감사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한국 라브리는 서울 후암동 저의 친정 집에서 약 12년을 지냈습니다.
라브리가 2001년에 양양으로 이사오고 난 후에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의지하지 않으시고 부천에 있는 한 교회에서 믿음의 새 가족을 섬기기 시작하셨습니다. 어머니가 나가시던 교회에서 ‘기도의 어머니’로 불리는 것에 상당히 부담스러워하셨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을 기억하며, 또 멀리 나가있는 선교사들을 기억하고 기도하셨습니다. 특히 독신 여성 선교사들을 위한 기도와 사랑은 수십 년 동안 끊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장례식에 찾아온 교회 식구들이 어머니를 회상하며 감사를 표하는 것을 보고 저희 자식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저희 삼 남매의 결정으로 어머니가 다시던 교회와 남동생 가족 외에는 아무에게도 장례식을 알리지 않았음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십여 년 동안 어머니는 혈육의 가족을 넘어서 믿음의 가족들을 사랑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한 목사님이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퇴근할 때에 권사님이 기도를 하고 계셨는데 다음 날 아침에 출근해 보니 권사님이 여전히 기도하고 계신 날이 많았습니다. 이제 저희 교회는 그런 기도의 어머니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권사님은 이제 하나님과 함께 계시니 훨씬 좋으시겠지요.”
어머니는 평생 기도하시던 라브리의 산책길 옆에 평안히 잠드셨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 다시 사실 것을 믿고 말입니다. 최근에 복지부에서 권장하는 방식대로 라브리의 산책길 옆에 수목장으로 모셨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잃었지만 라브리는 귀한 기도 가족 한분을 잃었습니다. 병상에서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찬송가 한 절을 부르며 기도 가족 여러분께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이제 라브리는 10월 10일부터 가을 학기를 시작합니다. 군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진현씨와 지난 여름 저희를 도와주었던 서영씨가 다시 헬퍼로 도울 예정이며, 캐나다에서 온 김진성 목사와 김슬아 사모가 세 아이를 데리고 1-2 년간 라브리에서 공부하며 저희를 도울 예정입니다. 같이 일할 사람들을 보내주시도록 기도해 주신 기도 가족에게 감사드립니다.
올 가을에는 한국 청년들만 아니라 다양한 국적의 청년들이 다녀갈 예정입니다. 특히 한동대학교의 코렐 슐튼 교수님과 카마이클 기숙사 학생들이 오기로 해서 역동성 있는 시간이 기대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로 잘 섬겨서 그들이 라브리 문을 나설 때는 진리를 발견한 기쁨으로 얼굴이 빛이 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2014년 10월 5일
경옥 올림
L'Abri Newsletter, October 2014
October 5, 2014
Dear L’Abri praying Family,
As InKyung and I returned from Seoul after a two-week lecture tour, we were surprised to find that most of the rice fields in Yangyang had already been harvested. As an itinerant lecturer in the concrete forest of the city, the turn of season is barely perceptible; in the countryside, on the other hand, it really does feel like autumn. How relieved I am to be back home in the comfortable self of a country woman!
We met people in six different churches and missionary organizations, telling them about the Christian Worldview. It was a tight schedule, but we learned a lot from the all challenges that we encountered. As we settle back in L’Abri for another regular term, we pray that we had been of help to those who attended our lectures.
Shortly before our lecture tour, on the 17th of September, my mother YoungJa Choi passed away. She had been diagnosed of undifferentiated thyroid cancer about a year ago, and in several prayer letters over the last few months, we have asked you to pray for her. Regrettably, the cancer prevailed. It must have been a very difficult year for her, but even in our grief we are also thankful that her suffering did not last too long. We also thank God that my mother’s faith in Him did not falter until the very last, and that I was given the wonderful opportunity to care for her along with my brother and sister. My brother SungMin stayed beside her almost every day for the past year, and my sister KyungSook took two months off from her job in L.A. to nurse her.
My mother was born in Japan. After independence, she returned to Korea with her mother, only to suffer the Korean War shortly afterward. Later, she married my father, ChangYoung Park, a man from North Korea who had fled to the South during the war. I was their first child, followed by my sister KyungSook (now married to Oh-Ig Kwoun) and my brother SungMin (married to HyeJin Seo). Around the time my brother was born, my family became Christian.
Many years later, when InKyung and I started Korean L’Abri, my mother let us use her mountainside house in Huamdong, Seoul. She gave us the whole house and retreated to a small room in the corner. It must have been terribly inconvenient, but she never complained about it, only thanking God for using her house for His work. L’Abri would not have been able to stay in Seoul for 12 years if not for my mother’s faith and generosity.
After L’Abri moved to Yangyang in 2001 and after my father passed away, my mother refused to depend on her children and began to serve a new spiritual family at a small church in Bucheon, about an hour away from Seoul. The people at her new church called her “the mother of prayer”, an honorable title that she tried very hard to live up to. She prayed for each and every member of her church, for missionaries in faraway countries, and for us, L’Abri. Over the decades, she paid particular attention to single women who worked as missionaries, praying for and attending to their every need as best she could.
My siblings and I wished to keep the funeral quiet and private, so we did not invite anyone other than family and my mother’s church members. We were very surprised at the amount of gratitude that the church members expressed in memory of my mother; for over ten years, she had loved and prayed for her church, effectively her second family, no less than she did for her first.
At my mother’s funeral service, a pastor from her church said: “I saw her praying when I went home in the evening, and she was still praying when I came back the next morning. This happened many times. It is a tremendous loss for our church that our mother of prayer is no longer with us, but I take solace in the fact that she will be happier than ever before, now that she is with the Lord.”
My mother rests in peace beside the footpath around L’Abri, for which she spent so many hours praying. We followed the “natural burial” guidelines of the Ministry of Health and Welfare, so there is no mound, no gravestone, and barely any markings; only the memory of her untiring prayers remains with us. I have lost my mother, and L’Abri has lost one of the most precious members of its praying family. But we believe that we will see her again, too, when we see Jesus again.
I would like to close with a hymn that my mother liked to sing in her bed:
Jesus, the very thought of Thee With sweetness fills my breast;
But sweeter far Thy face to see, And in Thy presence rest.
Our autumn term begins on the 10th of October. JinHyeon, recently discharged from the army, will work as a helper, as will SeoYeong, who helped us last summer. Pastor JinSung Kim and his wife Seul-Ah, from Canada, plan to stay, study, and help us for the next 1-2 years with their three children. We thank God for sending us people to share our burden.
Students and young adults from Korea as well as several other countries are planning to visit us this term. We are especially excited that Professor Cordell Schulten of Handong University and students of his Carmichael College will stay with us for a weekend later this month; this visit has been a long time in the making. Please pray that we will serve with love and wisdom each and every person that God sends us our way, and that their faces will shine with the joy of God’s truth as they leave our doorstep.
With love,
KyungOk
Translated by Kijin Sung